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문단 편집) == 출생과 성장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의 제후국 [[상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리트 임 인크라이스에서 가톨릭 가정의 변호사 아들로 태어났고, 린츠와 그라츠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나치]]의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칼텐브루너는 1913년에 린츠의 실업계 김나지움에 입학해 재학 중 범게르만주의와 반교권주의적 단체인 호엔슈타우펜에 가입했다. 여기서 알게 된 [[아돌프 아이히만]]과 친구가 되었다. 1921년 가을에 그라츠 대학교에 입학한 칼텐브루너는 처음에 화학을 전공했지만 1923년에 법학으로 갈아탔고 1926년 여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탄광에서 야근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며 공부했다고 하며, 이를 근거로 자신이 노동자들의 매우 가까운 친구임을 강조했다. 또한, 대학 생활 중 다른 학생과 결투를 벌여 얼굴에 깊은 흉터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텐브루너는 1926년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잘츠부르크에서 1년간 로펌 소속변호사로 일했고, 그 후엔는 린츠에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활동했다. 1929년에 호국단의 준군사 활동에 참가한 칼텐브루너는 이들 단체가 자신의 목적이던 [[오스트리아 병합]]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요제프 디트리히]]의 추천으로 1931년 9월 31일에 친위대에 입대했고 1932년 당시 비합법이었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다. 오스트리아의 친위대 부대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지휘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일의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의 직접 지휘하에 있었다. 1932년부터 칼텐브루너는 부친의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나치당원의 무료변호 활동에 종사했다.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오스트리아에서도 나치당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1933년 6월에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에 의해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금지당하고 당원들이 체포되자 칼텐브루너도 1934년 1월 14일에 엘리자베트 에델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체포되었다. 카이저슈타인불프 수용소에 감금된 그는 4월에 석방된 후 1934년 6월 15일에 린츠의 친위대 제37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불법 정치 활동과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고, 1935년 5월에 국가반역죄로 다시 체포된 칼텐브루너는 징역 6개월형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래도 힘러는 칼텐브루너를 오스트리아에 남겨두어서 약 6개월 뒤 풀려나 이듬해에는 여단지도자로 진급해 오스트리아 친위대 지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힘러는 1935년 6월 15일에 칼텐브루너를 제37연대 사령관에서 친위대 8지구(린츠지구)의 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칼텐브루너는 가끔씩 린츠에서 밀입국으로 독일에 들어가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츠 요스트]] 등에게 첩보를 보고하며 활동했다. 1936년 이후 독일의 “오스트리아 구제사업국”으로부터 구제사업기금을 불법으로 설립한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지하운동 조직의 자금줄이 되어 그를 통해 독일정부에서 내려오는 비밀지령을 수행했다. 1936년 7월 11일에 빈 주재 독일공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의 중재로 오스트리아 수상인 [[쿠르트 슈슈니크]]와 [[아돌프 히틀러]] 사이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오스트리아 병합]]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힘러로부터 오스트리아 친위대에 이 협정을 파기하는 활동을 하지 말 것을 지시받은 칼텐브루너는 이 명령을 바탕으로 1937년 1월 20일에 오스트리아 나치당 내의 급진파를 누르고 [[오스트리아 연방국]] 전역의 친위대 총지도자인 친위대 상급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라이너]]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밀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그렇게 급진파 지도자인 요제프 레오폴트를 실각시킴으로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내 항쟁에서도 사실상 승리했다. 1938년 2월 12일에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슈슈니크의 회담에 기초하여 2월 16일에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에 임명시켰다. 그러나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 독립을 지키려고 했기에 히틀러는 3월 11일 새벽 2시에 [[독일 국방군|독일군]] 부대를 국경으로 출동시켰고, 히틀러와 괴링으로부터 요구--협박--를 받고 오전 7시에 슈슈니크는 수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새 수상으로 임명해야 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신임 수상은 힘러의 압력으로 인해 보안국방장관 자리에 칼텐브루너를 임명했다. 3월 13일에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재통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마르크 주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병 후에도 오스트마르크 주 국가대리관이 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아래에서 1938년 8월까지 칼텐브루너는 보안국 장관을 유지했다. 힘러의 명령으로 린츠의 동쪽 약 20km 지점에 건설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설립에 관여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의 [[게슈타포]] 조직창설에도 관여했다. 1938년 3월에 합병과 함께 친위대 상급지구 에스터라이히의 본부를 린츠에서 빈으로 옮기고 1938년 5월에는 이름을 “도나우“로 바꾸었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9년 1월에는 독일 국회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집단지도자로 승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무장친위대]]로 위치를 옮겨서 주로 독일 내의 치안경찰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